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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화로 읽는 섬이야기] 군산 장자도 가는 길(3)
    해양문학 2021-03-12 08:45:48
    바다가 가끔 그리운 것처럼 바지락 칼국수도 비오는 날은 더 그립고 생각난다. 음식을 맛나게 먹는 것도 좋지만 그 음식과 함께 했던 장소, 시간, 사람들이 함께 추억된다. 지금은 저 세상으로 가신 시어머님이 생각난다. 나는 시어머님이 만들어주신 음식을 좋아했다. 시어머님은 음식을 먹기보다 만들어서 나눠주는 일을 더 좋아했다. 처음에는 자꾸 먹을 것을 만들어 놓았으니 먹으러 와라! 가져가라! 권하는 행동이 부담스러웠지만 시어머님의 정성이 담긴 음식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맛이 그립고 그 정이 그리워졌다. 지두리 해변 바지락(사진=섬문화연구소DB) 시어머님이 만들어준 음식을 맛나게 먹으면 잘 먹어서 예쁘다! 라고 하시며 남은 음식까지 싸주셨던 시어머님의 음식사랑. 그분과 함께 했던 바지락칼국수를 먹으면 그분이 만들어준 음식들까지 그리워진다. 그리고 그 맛을 생각하며 입맛을 다신다. 휴가철이 되면 시댁 3남2녀 가족들이 모인다. 가만히 있어도 더운 날 20명 정도 되는 대가족들이 모여서 먹기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조용히 휴가를 즐기고 싶은 나는 ‘이게 무슨 휴가야?’ 하는 못마땅한 시선으로 시댁가족들을 관찰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꼬나봤다. 하다하다 이제는 시어머니가 안계시니 시누들이 와서 며느리들을 괴럽혀! 뭐 이런 마음으로 그들을 지켜봤다. 시댁 큰아들, 둘째아들, 셋째아들은 누나들이 해주는 반찬이며 음식들을 맛나게 먹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문득 어미새가 아기새들에게 먹이를 챙겨주는 장면과 오버랩되기 시작했다. 누나들이라고 이 여름이 덥지 않았겠는가. 누나들이라고 쉬고 싶지 않았겠는가. 누나들은 맛나게 엄마의 손맛을 느껴보고 싶은 동생들에게 엄마의 손맛을 전수 받은 음식 솜씨로 동생들에게 어머니의 그리움을 전달해주고 있었다. (계속) 박월선(동화작가)
  • [동화로 읽는 섬이야기] 군산 장자도 가는 길(2)
    해양문학 2021-01-29 09:13:52
    전망 좋은 위치마다 펜션들이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저 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또 얼마나 이 바다가 오염될까 염려되었다. 아직은 깨끗한 이 섬들이 편리한 도로와 다리가 연결되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겠지. 이 섬에 살던 사람들은 외로움은 조금 덜하겠지. 그러나 섬은 점점 병들어가겠지. 뭐 이런 생각들을 해보았다. 장자도 전경(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오랫동안 시댁 가족들과 함께 먹었던 바지락 칼국수가 그리웠다. 장자도 해변을 돌다가 맛집을 찾지 못하고 옛날 맛집, 변산 바지락칼국수를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15년 넘게 그 자리를 지키며 바지락칼국수를 팔고 있다는 주인장을 만났다. “장자도에 사람이 많은데 여기는 한산하네요.”라고 말하자, 주인장이 한숨을 쉬며 옆 자리에 앉았다. “그렁게, 장자도로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고 변산 해변만 돌다가 가버리니, 칼국수를 먹는 사람들이 줄었당게.” 그리곤 휙휙 식당을 지나는 차들을 야속하게 바라본다. 새만금방조대가 열리기 전에는 변산에 사람들이 많이 머물렀는데 도로가 발달하여 모두 군산으로, 장자도로 빠져나간다고 했다. 사람들은 변산에 머물지 않고 흘러간다는 것이다. (계속) 박월선(동화작가)
  • [화제의 시집] 영랑의 고향 강진여류시인 향토적 남도 노래하다
    해양문학 2021-01-20 12:14:05
    이수희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울음 단추」가 고요아침에서 출간했다. 52편의 풋풋한 농어촌 소재를 중심으로 작품을 엮어낸 이 시집은 어머니와 자식을 둔 인생 고갯마루에 선 시인이 뒤안길과 이녁의 쓰디쓴 삶의 흔적들이 눈발처럼 사라진 여백의 공간에서 자유과 허무 혹은 외로움의 체험기를 진솔하게 그려낸 시편들이다. 어릴 적 긴긴 밤 방 윗목에서 석화 까고 바지락 까는 우리 엄마 석화 바지락 까는 소리 온 식구의 자장가였지 대덕장 칠량장 마량장 강진읍장에서 그 갯것, 내다 팔아 우리들 용돈과 제끼장 사주고 더 모아 공납금 주었지 7남매 새끼들이 돈 주라고 보채면 조세 호멩이 들고 거침없이 뻘밭으로 달려가신 울 엄마 85세 세월 나이 잊고 바다 나가는 일 아직 남았네 이제는 눈에 삼삼한 손자 녀석들 촐랑촐랑 밟혀서일까 나는 오늘 그 석화 편하게 앉아서 먹고 또 잠이 오네 - ‘철없는 잠’ 전문 이수희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울음 단추' 이 시는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시공간이 파노마라처럼 스치는 한 편의 액자그림이다. 엄마가 ‘석화 바지락 까는 소리 온 식구의 자장가였’다. 아니, 자식들이 모두 잠든 한밤중에도 엄마는 식솔들을 위해 밤새 조세(굴 까는 어구)를 찍고 하얀 굴 알맹이를 꺼내 모았다. 그것을 장에 내다 팔아 ‘7남매 새끼들’ “용돈과 제끼장(공책) 사주고/더 모아 공납금”을 마련했다. 아무리 삶이 팍팍하고 힘들어도, 찬바람 쌩쌩 부는 날도 엄마는 “거침없이 뻘밭으로 달려”갔다. 어느덧 85세이지만 “나이 잊고/바다 나가는 일 아직 남았네/이제는 눈에 삼삼한 손자 녀석들” 때문이다. 엄마는 최선을 다해 7남매를 키웠고 잘 자라줘 고마울 뿐이다. 자꾸 못해 준 부분만 기억나는 울 엄마는 푸른 물결처럼 촐랑촐랑한 손주들이 또 하나의 희망이고 기쁨이다. 그러니 더더욱 바다로 나가고 싶다. 이제 엄마가 갯가로 나가는 일은 또 하나의 행복을 만드는 과정이다. 열매를 따로 가는 길이다. 그 시절보다야 팍, 줄어든 갯것들. 허구한날 갯벌체험이니 뭐니 바다를 긁어가는 도회지 사람들에게도 늘 마음을 열어준 바다처럼, 마르지 않은 끝끝한 갯물 같은 모성애. 그렇게 자식농사 잘 지은 울 엄마기에 시인은 석화를 달게 먹고 마음 편히 잠잘 수 있음이라. “냄새나는 은행 알 줍는다/남새난다고/더럽다고/버린 것들 많았는데//시간이라는 것/일이라는 것/몇 시/몇 분/몇 초를 담는/하루 자루//(중략)/가을을 줍는다”(‘가을을 줍는다’ 중에서) 이번 시집은 전반적으로 회한과 눈물이 스며있다. 글의 진정성을 살려준 대목이다. 솔직담백한 서사가 젖어든 탓이다. 인생은 한 권의 책이다. 우리는 매일 한 자, 한 페이지씩 온몸으로 기록해 나간다. 시인은 시, 분, 초를 다투며 책갈피를 넘긴다. 그러면서 뒤안길을 짚어가는 여백의 삶을 놓지 않았다. 꽃을 기르면서, 꽃차를 다스리면서, 나를 다스리면서, 꽃들의 잉태 그리고 동토를 뚫고 어깨 쑥쑥 밀며 나오는 몸부림의 순간들을 배려하고 기억한다. 이런 시인만의 체험이 잔잔하게 녹아들었다. 자연친화적인 정서와 목가적 문맥 속에 눈물과 회한이 흘러, 흘러 바다에 이른다. 진한 눈물은 갯물이 되고, 석화를 피어내고, 풍요롭고 행복한 바다를 열어준다. 희망과 행복으로 이어져서 글의 생명력도 빛났다. 문학평론에서 이런 방식의 시 정신을 일러 부활, 윤회사상, 연기망 정서가 배였다고 표현한다. 모든 삶은 우주의 순환, 삼라만상과 연결된 것으로 바라보는 문학정신이다. 시인은 문학과 삶의 성숙기에서 그렇게 고향 무대에서 세상을 마음껏 노래하고 있다. 시인이 태어난 강진이라는 시공간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이번 시집을 지극히 관념적, 추상적, 편린의 언어분석으로 단편적으로 접근할 우려가 있다. 체험이 생략되고 환경이 도외시 된 도회지 인문학적 정서로 농어촌과 예술 공간이 어우러진 남도정서를 해독하기 쉽지 않을 터. “달빛 받아 빛나는 정상/어찌 말하는 입 하나 가지지 못했단 말인가//(중략)//산 비릿내 왈칵 쏟아내는 새벽이면/매운 바람 쥐어짜며/오로지 돌이 되어야 하는 것/어찌 바위라고 변명만 하리오”(‘월출산’ 중에서) 홍매화(서성강 화백) 월출산은 행정구역으로 영암군에 속하지만 강진군 벌판에서 바라보면 그 자태가 매우 선명하게 다가선다. 특히 정상 돌부리와 능선이 백설을 뚫고 나오는 모습은 절경이다. 돌산으로 유명한 이 산에는 야생 들국화가 군락지가 있고 안개 바람이 나부끼면 그 신비로움이 더해진다. 한 폭의 수묵화다. 시인은 이 바위산을 통해 “오로지 돌이 되어야 하는 것/어찌 바위라고 변명만 하리오”라고 묻는다. 살다보면 안다. 가장 깊은 감정은 침묵 속에 있다는. 때를 얻은 침묵은 지혜이며 그것은 어떤 웅변보다도 낫다는 사실을. 시인은 그렇게 월출산 바위침묵을 통해 이녁을 반추했다. 시인이 바위산을 바라보며 하는 말을 ‘홍매화’를 통해서도 노래했다. “손 곱은 눈(雪)/툭툭/서로 파고드는 날일 때//중략)//숨길 수 없는 꽃/한 송이/가슴”(‘홍매화’ 중에서). 홍매화는 쓰러지기 직전의 고목에서도 붉은 꽃을 피워낼 정도로 생명력을 자랑한다. 시린 눈 속에서 붉은 꽃을 피어내기 위해 ‘일어나고’, ‘설레이고’, 마침내 ‘한 송이/가슴’을 열었다. 문득,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를 떠올려준다.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 말이다. 그런 홍매화와 시인의 모습을 오버랩 된다. 내재율과 외재율 사이 문턱 없는 삶 참 힘들어라 안과 밖 - ‘내재율과 외재율 사이’ 전문 '울음 단추' 시집 표지 앞서 인용한 작품의 흐름, 그 은유의 속울음, 침묵 등을 이 시가 함축한 셈이다. 시인의 고뇌와 철학, 그 일면을 고백했다. 정진하는 스님의 고뇌의 경계가 ‘산문 안과 밖’이라면 시인에게는 ‘내재율과 외재율 사이’다. 여성으로 태어나 딸로, 어머니, 아내, 시인으로, 경영자로 살아가면서 수 없이 만나는 풍경 속의 내가 나에게 던지는 화두다. ‘문턱 없는 삶’, 누구나 ‘참 힘들’다. 경계 없는 삶을 위해 교감과 소통이 필요하고 절제와 침묵이 필요하다. 그러나 ‘참 힘들’다. 세상은 기표(상징)와 기의(의미)로 이뤄졌다. 붉은 신호등(기표) 앞에서 멈추고(기의) 푸른 신호등 앞에서 걷는다. 우리는 시 한 편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기표와 기의를 해독할 수 있다. 나와 너, 우리의 거리와 사상철학을 찬찬히 음미할 수 있다. 한 편의 시를 감상하는 과정이 그 무엇보다도 기쁘고 행복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사진: 박상건(시인.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 [수필가가 본 시의 세상] 꿈꾸는 격렬비열도/박상건
    해양문학 2020-11-17 17:29:23
    <詩境의 아침> 꿈꾸는 격렬비열도/박상건 망망대해 그 너머/ 연사흘 흰 거품 물고 칠천만 년 꾹꾹 눌러 둔 고독이// 마침내 폭발하더니만, 깊고 깊어 푸른 그 그리움 더 어쩌지 못하고 파도소리 뜨겁게 퍼 올려/ 등대 불빛을 밝히는 서해 끝 섬// 온몸 뒤틀며 태어난 기억/ 파도소리 홰칠 때마다 귓전에 여전한데 두 눈 껌벅 껌벅/ 황소처럼 드러누워/ 또 무슨 꿈을 꾸는가// 대륙을 휘달리던 바람 소리를 키질하듯 산둥반도로 가던 장보고의 박동 소리를 풀무질하듯 독수리의 날개 짓으로 이 바다를 휘몰이 하는 해안선 주상절리로 아로새기고/ 틈틈이 해국을 피워 흔들면서 다시 비상을 꿈꾸는 섬// 멀리서 바라보면/ 유채꽃 원추리로 노랗게 출렁이고 등대지기 거닐던 동백 후박나무 밀사초 섶길 위로 포물선 그리며 푸른 바다에 수를 놓는/ 새들도 쉬어가는 삼형제의 섬 격렬비열도- 박상건, ‘꿈꾸는 격렬비열도’ 해식애 절벽 위에서 섬으루 촬영 중인 박상건 시인(섬문화연구소DB) <수필가가 본 시의 세상> 가 보고 싶은 섬이 있다. 2015년 8월 31일 EBS에서 <한국기행>프로에 방영했으니 꼭 5년이 지난 셈이다. 25여 년 간 우리나라 섬을 찾아서 그들의 이름을 찾아 주고 그 존재를 알려주는 박상건(섬문화연구소장)시인의 노력이 있어 섬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 이름, 격렬비열도. 독도가 우리나라 동해의 끝이라면 격렬비열도는 서해의 마지막 끝 섬 즉 최서단에 위치한 섬이다. 지정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섬이면서 서해에서 가장 맑은 바다청정해역을 보유한 섬이고, 칠천만 여 년 전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내 관심을 높였던 것은 매우 가기 힘든 섬이지만 갈 수만 있다면 보물을 품고 있는 섬이라는 점이었다. ‘풍화 열에 의해 벌집처럼 구멍이 나 있는 특이한 섬’이며 파랑에 의한 침식으로 해식 절벽(해식애)이 아슬하고, 보일 듯 말 듯 숨겨진 해식동굴이 비밀스럽다. 파식대 위에 작은 바위섬인 시 스택(sea stack)이 멋지다면 주상절리비경과 기암괴석이 신비롭다. 야생 동식물들과 괭이 갈매기의 보금자리를 마련해준 섬, 100년 이상의 동백나무 군락지가 밀림의 터널을 이루고 있는 섬. 비단벌레가 선택한 나무- 팽나무가 많은 섬, 귀한 후박나무가 있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갯메꽃, 갯장구채, 갯까치수영, 해국이 활짝 피는 섬이니 어찌 가보고 싶지 않을까. 거친 파도 헤치고 가서 그 내면의 소리, 듣고 싶어진다. 푸른 그리움 어쩌지 못하고 파도 소리로 퍼 올리며 비상을 꿈꾸는 섬, 격렬비열도. 너는 황소처럼 순한 눈망울을 가졌지. 독수리의 강인한 날갯짓으로 바다를 휘몰이 할 줄도 알지. 새들도 쉬어 가게 하는 너그러운 품성도 지녔어. 어쩌면……고독의 망망대해를 등대불빛으로 밝혀주기 까지 하는구나. <수필가 박모니카> 필자 박모니카 * <경상매일신문> 2020년 08월 30일자 기사 재수록
  • [동화로 읽는 섬이야기] 군산 장자도 가는 길(1)
    해양문학 2020-10-19 10:20:00
    최근 장자도로 가는 도로가 열렸다. 군산 비응도 입구 수산도매점은 한산했다. 새만금 방조제가 뚫리고 많은 사람들이 올 것을 기대했다. 수산도매점에도 사람들이 넘쳐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지금의 상가 분위기는 한적하기만 하다. 바닷가 바지락(사진=섬문화연구소DB) 새만금방조제를 지나서 야미도, 몽돌해변, 신시도, 고군산대교를 지나서 무녀도를 달렸다. 그 동안 바다에 둘러싸여 외롭게 견뎌냈을 시간들이 느껴졌다. 무녀도에는 마을 공동운영체 캠핑장이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와서 캠핑을 하면 바다를 느낄 수 있는 좋은 장소라 생각된다. 선유대교를 지나서 해변을 걸었다. 해수욕장을 개장했는데 아직도 공사중 이다. 조금 서둘렀다면 좋았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느껴졌다. 섬 주변을 돌 수 있게 도로를 넓혔고 주변에는 식당들이 즐비하다. 무엇을 먹어 볼 까 식당 메뉴를 훑어본다. 아침 일찍 서둘러 나와서인지 배에서 꼬르륵 신호를 보냈다. 이곳저곳 식당을 기웃거렸다. 바지락칼국수 판매한다는 현수막 안내가 보여 식당으로 들어갔다. 손님들이 들어서는 시간이라서 바지락칼국수가 모두 동났다고 했다. 거짓말! 이라는 직감이 왔다. 손이 많이 가는 칼국수 메뉴를 주문 받지 않으려는 속셈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메뉴에 끌림이 없었다. 거기서부터 식욕이 사라져버렸다. 식당을 나왔다. (계속) 박월선(동화작가)
  • [동화로 읽는 섬이야기] 비응도, 해당화 지다(5편)
    해양문학 2020-10-11 09:02:30
    할머니가 구급차에 실려 가자 방안에 덩그러니 보따리만 남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보따리를 풀었다. 보따리 속에는 커다란 수건이 돌돌돌 말아져 있었다. 수건을 풀자 또르르 또 하나의 수건이 구르며 방바닥에 펴졌다. 그러더니 그 위에 아기저고리가 있었다. “어! 이게 뭐야?” 그때 아빠가 내 방문을 열었다. “배냇저고리구나. 아기 옷이지.” 해당화(사진=섬문화연구소DB) 아빠는 배냇저고리를 들었다. 그런데 배냇저고리 속에 있는 것이 방바닥에 툭 떨어졌다. “어? 손갈퀴네!” 내가 작은 손갈퀴를 들자 아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에그, 이게 보물이라고?” 몹시 실망스런 표정으로 나는 갈퀴를 들었다. 아빠를 보자, 무척 괴로워 보였다. 부엌으로 간 아빠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고는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으흐흐흐." 아빠는 자꾸자꾸 헛웃음을 쳤다. 웃음소리는 눈물을 머금고 거실 가득 떠다녔다. 그러더니 먼지처럼 구석으로 슬그머니 내려앉았다. “아빠, 왜 그래. 괜찮아?” “동이야. 이것이 무엇인지 아니?” “갈퀴! 나도 알아. 할머니가 조개 캐는 거잖아.” “그래, 조개 캐는 거지. 이 지겨운 갈퀴를 왜?” 아빠는“왜?”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베란다로 나가더니 비응도 쪽을 바라봤다. 우리 할머니는 새만금 방조제 사업이 한창인 비응도에 산다. 넓은 바다 한가운데에 작은 섬이다. 섬 뒤로는 군산에 있는 은파 유원지가 보이고, 섬 앞은 망망대해 바다가 있다. 여름마다 우리 가족은 비응도에서 휴가를 보냈다. 그곳에는 썰물이 되면 넓은 갯벌이 드러난다. 맨발로 갯벌 위를 걷는 감촉은 너무 보드랍고 좋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새만금 방조제 사업 때문에 비응도가 무너지고 있다. 외부 사람들은 나라에서 보조금을 받으니, 이 섬을 벗어 날 좋은 기회라고 하지만 할머니는 아닌 것 같다. 비응도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할머니의 마지막 남아 있는 힘도 함께 사라진 것 같다. 할머니는 비응도에서 백합조개를 캐서 아빠를 대학까지 보냈다고 늘 자랑삼아 이야기했다. 비응도로 열세 살에 시집와서 칠십 삼세까지 할머니는 바다와 함께 산 것이다. 바다가 방조제로 막히고 지금은 새로운 관광단지가 세워지고 있다. 이제는 할머니 기억 속에 박제되어 버린 비응도와 작은 손갈퀴만이 웃고 있었다. 갈퀴를 보자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빠, 빨리 할머니한테 가자!” 처음처럼 갈퀴를 보자기에 묶고 아빠의 팔을 끌었다. 아빠의 우울한 얼굴이 불빛 아래서 번쩍 고개를 들었다. 병원에 도착하자 할머니를 간병하고 있던 엄마가 우리를 보고 놀란 표정으로 일어섰다. “할머니, 보따리 두고 가면 어떻게 해?” 보따리를 할머니 품속에 넣어 주었다. 링거 바늘이 꽃힌 팔이 파랗게 멍들어 있었다. 할머니가 실눈을 뜨더니 초승달처럼 웃었다. 나는 엄마, 아빠의 손을 끌어다 할머니 손에 쥐어 주었다. 할머니 얼굴에 핀 검버섯이 뿌리 채 뽑혀 말라가던 비응도의 해당화 같았다. (비응도편 마지막회) 박월선(동화작가)
  • [유배지 섬을 찾아서] 최익현, 정약전의 유배지 흑산도
    해양문학 2020-09-25 08:58:07
    목포항을 떠난 여객선이 다섯시간 남짓 달려와 머무는 곳. 배도 숨이 가빠 헐떡거리고, 배에 탄 사람들도 모두 기진맥진한 모습들이다. 전남 신안군 흑산면 흑산도. 목포에서 100여 킬로미터 쯤 떨어진 서남해의 외딴섬이다. 지금은 쾌속정으로 두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이지만, 120여 년 전 유배객 면암 최익현(1833 ~ 1906 勉菴 崔益鉉)은 물을 떠난지 꼭 7일만에 이 섬에 당도했다. 돛을 달고, 바람의 힘으로 파도와 싸워가며 이 섬에 닿았을 것이다. 이 섬은 또 200여 년 전 손암 정약전(1758 ~ 1816ㆍ 정약용의 형)이 16년의 유배생활을 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정약전은 이곳에서 우리나라 수산생물을 조사・기록한 ‘자산어보’를 남겼다. 흑산도 상라봉(사진=섬문화연구소DB) 면암 최익현. 구한말의 유학자이자, 유림을 대표해서 민중을 이끈 항일구국 대열의 거목이다. 그가 어떻게 해서 사람의 발길이 쉽게 닿을 수 없는 이 머나먼 섬 흑산도에 귀양을 오게 됐는가. 1876년 1월 24일, 최익현은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엎드려 척화의 상소를 올린다. “전하. 소신의 상소가 부당하다면 이 도끼로 저를 죽여 주시옵소서” 최익현은 이 무렵 일본의 강박에 못 이겨 한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조약)를 체결하려는 움직임에 분연히 일어나, 죽기를 각오하고 척화(斥和)상소를 올린 것이다. 최익현은 이미 이때 유학자로서의 특성을 강하게 지니면서도 문호개방에 따른 외세의 침입과 일본제국주의의 야욕을 처음으로 통찰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결국 최익현의 상소는 용납되지 않았다. 그는 체포돼 국문을 받았으며, 1월 27일 전라도 나주목 흑산도를 위리안치의 명을 받았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그가 목숨을 걸고 반대하던 저 한일수호조규가 체결되는 날이기도 하다. 그는 2월 9일 유배길에 올라 다경진(多瓊津 ㆍ 지금의 신안군의 한 포구)을 떠난지 7일간의 험난한 항해 끝에 적소인 흑산도 진촌(지금의 흑산도 진리)에 닿았다. 최익현은 이곳에서의 유배생활 4년 만에 방환돼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72세의 노구를 이끌고 분기, 의병을 일으켰다. 흑산도 예리항(사진=섬문화연구소DB) 그는 각지에서 항전을 계속하다 전북 순창에서 일경에 체포, 일본 땅 대마도로 끌려갔다. 대마도를 가는 길에 양식과 장작, 물을 가지고 갔으며, 이것들이 동이 나자 “내 늙은 몸으로 어이 원수의 밥을 먹고 더 살겠느냐. 너희나 살아 돌아가 나라를 구하라” 고 부하들에게 말한 뒤 식음을 전폐, 운명했다. 그의 나이 73세였다.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난 최익현은 벼슬길에 오른 뒤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사간원정언, 이조정랑, 호조참판 등을 역임했으며, 첫 제주유배에 이어 두 번째로 흑산도 유배를 당했었다. 옛 면암의 적소였던 진촌마을은 여객선의 닿는 예리항에서 북쪽으로 2킬로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바다와 면한 언덕에 자리잡은 마을, 옹기종기 집들 사이로 백년도 훨씬 더 된 초가집 3채가 나란히 서있다. 흑산면 진리 5백 37번지. 쓰러질 듯한 초가삼간이 곧 면암이 거처했다는 초막이다. 적소 뒤편에 면암이 이름지었다는 의두석(椅斗石) 바위가 있다. 돌이 편편해 면암이 가끔 올라가 앉거나 누워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는 바위다. 주위에는 소나무와 동백나무가 우거져 있다. 예리항에서 조그마한 통통배를 빌려 타고 우측으로 흑산도 주위를 한 시간쯤 돌아가면 흑산면 천촌리에 닿는다. 면암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고, 비석 뒤 바위에 면암의 육필이 새겨져 있는 곳이다. 흑산도 사람들은 이 마을을 ‘예티미’ 마을이라고 부른다. 이 유허비는 1958년 흑산면 유지들이 주축이 돼 세웠으며, 비석 뒤 지장암 바위에는 ‘指掌嵒’ 세 글자위에 ‘箕封江山 洪武日月’이라는 여덟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면암이 그의 유배가 풀리던 해인 1878년 제자들을 데리고 이곳에 들렀다가 쓴 것인데, 각자는 제자 박양희(朴良喜)가 한 것이다. ‘기자강산’ 이란 기자가 세운 나라, ‘홍무’란 명나라 태조의 연호이다. 면암은 흑산도 유배 중 서당을 열어 젊은이들의 교육에 정열을 쏟았다. 아울러 섬 주민들의 인지계발과 폐습타파에도 힘을 기울여, 흑산도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었다. 지금도 이 섬의 노인들은 흑산도가 딴 섬에 비해 미신 폐습 등이 거의 없고, 주민들의 교육열이 유독 높은 것도 모두 면암선생의 영향 때문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이성부 시인(사진=섬문화연구소DB) ※ 이 글은 고 이성부 시인이 생전에 집필한 원고다. 이성부 시인은 1942년 광주에서 출생했다. 고교 때 <전남일보> 신춘문예로 당선됐고 대학생 때 <현대문학> 재등단했고 제대 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했다. <샘이깊은물> 편집주간, <일간스포츠> 문화부장을 지냈으며 섬문화연구소 상임고문을 맡았다. 평소 산을 사랑하며 山시인으로 유명했던 시인은 "섬도 물에 뜬 산"이라면서 남다른 섬사랑을 보였다. 섬문화연구소 답사여행 때 집필한 시인의 육필 원고를 정리해 싣는다.
  • [동화로 읽는 섬이야기] 비응도, 해당화 지다(4편)
    해양문학 2020-09-23 14:14:28
    장난으로 시작한 호기심은 점점 짙어갔다. 이 번 기회에 명탐정 실력을 한 번 발휘하고 싶었다. 할머니는 갓난아기를 안 듯 보따리를 안고 우리를 앞질러 걸어가고 있었다. 엄마와 나는 바짝 뒤따라갔다. “왜, 보따리를 목욕탕까지 들고 왔을까?” “글쎄, 참 별스럽네.” 엄마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의 보따리에 대한 집착은 계속되었다. 식사 때도 보따리를 들고 왔을 정도니까. 서해안 갯벌에서 조개잡는 사람들(사진=섬문화연구소DB) “어머니 그 보따리 이리 주세요. 장롱에 넣어 둘게요.” “아니다!” 차갑게 대답하더니, 할머니는 식탁 의자에 끼고 앉았다. 이번에는 등받이가 된 것이다. ‘아, 대단하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구릿빛으로 물든 할머니 피부가 형광등 불빛 아래서 바삭바삭 부서질 것처럼 보였다. 할머니는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보따리를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할머니가 식탁에서 일어나서 막 내방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전화가 왔다. “네, 여기 계셔요.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가 계신 방문을 바라보며 엄마가 말했다. “이장님이세요. 마을 회의를 했는데 어머니가 보상을 안 받겠다고 고집을 부리셨다고 하네요. 당신이 어떻게 설득 좀 해 봐요.” 아빠는 걱정스러운 듯 방문을 바라보았다. “당신 내게 할 말 있어?” 계속 아빠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엄마가 이상했는지 아빠가 물었다. 이때를 기다리듯 엄마가 아빠 곁으로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여보, 어머니 집 때문에 공사가 중단 됐대요. 보상금을 받으면 이번 기회에 넓은 평수로 옮길 수 있을 텐데.” “당신은 넓은 아파트가 그렇게 좋아?” “그럼, 좋지. 싫어하는 여자가 어디 있어?” 엄마가 얼굴을 붉히며 말하자 아빠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소파에서 일어났다. 나는 놀라서 엄마와 아빠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옆에 있는 것을 상관하지 않고 숨을 쌕쌕거렸다. 엄마의 목표는 어느새 넓은 아파트로 옮겨야 한다는 것으로 정해진 것 같았다. 우리 엄마는 끈질기다. 한 번 정한 목표는 절대로 포기하는 법이 없으니까.(계속) 박월선(동화작가)
  • [동화로 읽는 섬이야기] 비응도, 해당화 지다(3편)
    해양문학 2020-09-15 12:34:12
    장난으로 시작한 호기심은 점점 짙어갔다. 이 번 기회에 명탐정 실력을 한 번 발휘하고 싶었다. 할머니는 갓난아기를 안 듯 보따리를 안고 우리를 앞질러 걸어가고 있었다. 엄마와 나는 바짝 뒤따라갔다. “왜, 보따리를 목욕탕까지 들고 왔을까?” “글쎄, 참 별스럽네.” 엄마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의 보따리에 대한 집착은 계속되었다. 식사 때도 보따리를 들고 왔을 정도니까. “어머니 그 보따리 이리 주세요. 장롱에 넣어 둘게요.” “아니다!” 차갑게 대답하더니, 할머니는 식탁 의자에 끼고 앉았다. 이번에는 등받이가 된 것이다. ‘아, 대단하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구릿빛으로 물든 할머니 피부가 형광등 불빛 아래서 바삭바삭 부서질 것처럼 보였다. 할머니는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보따리를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할머니가 식탁에서 일어나서 막 내방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전화가 왔다. “네, 여기 계셔요.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가 계신 방문을 바라보며 엄마가 말했다. “이장님이세요. 마을 회의를 했는데 어머니가 보상을 안 받겠다고 고집을 부리셨다고 하네요. 당신이 어떻게 설득 좀 해 봐요.” 아빠는 걱정스러운 듯 방문을 바라보았다. “당신 내게 할 말 있어?” 계속 아빠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엄마가 이상했는지 아빠가 물었다. 이때를 기다리듯 엄마가 아빠 곁으로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여보, 어머니 집 때문에 공사가 중단 됐대요. 보상금을 받으면 이번 기회에 넓은 평수로 옮길 수 있을 텐데.” “당신은 넓은 아파트가 그렇게 좋아?” “그럼, 좋지. 싫어하는 여자가 어디 있어?” 엄마가 얼굴을 붉히며 말하자 아빠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소파에서 일어났다. 나는 놀라서 엄마와 아빠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옆에 있는 것을 상관하지 않고 숨을 쌕쌕거렸다. 엄마의 목표는 어느새 넓은 아파트로 옮겨야 한다는 것으로 정해진 것 같았다. 우리 엄마는 끈질기다. 한 번 정한 목표는 절대로 포기하는 법이 없으니까. 그 다음날부터 엄마는 평소와 다르게 할머니에게 다가가서 애교스럽게 말했다. “어머니, 드시고 싶은 것 있으면 뭐든지 말씀하세요?” 애교스런 목소리로 엄마가 말했다. “하루 세끼 밥이면 됐다.” 할머니는 먹을 것에도 관심을 쏟지 않았다. “어머니, 그럼〜 목욕도 했으니 멋진 옷 사러 갈까요?” 할머니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엄마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애비가 힘들게 일해서 번 돈 그렇게 낭비 하냐?” 엄마를 못 마땅하게 바라보며 할머니는 혀를 쯧쯧 찼다. ‘어쩜, 할머니는 엄마의 응흉한 속을 저리도 모를까?’ 작전이 먹히지 않자 엄마는 짜증스런 얼굴로 부엌으로 갔다. 아마도 부엌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고 있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한다. 엄마 기분.’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할머니는 보따리를 베고 돌아누웠다. ‘아뿔싸, 보따리가 저렇게 여러 가지로 사용되는 줄 미처 몰랐네.’ 나는 보따리에 대한 별별 상상을 다 하며 감탄하고 있었다. “동이 너는 시험공부 안 하고 뭐하니?” 엄마가 부엌에서 소리쳤다. 엄마의 심기 불편한 화살이 나에게 날아왔다. 굴 까는 섬마을 할머니들(사진=섬문화연구소DB) ‘피하자, 불화살은 일단 피하고 보는 것이다.’ 나는 얼른 문제집을 들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할머니가 오시고 내 공부방은 거실 소파가 된 것이다. 내 방이 없어졌다는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보따리에 대한 호기심은 커져갔다. ‘저 보따리에 뭐가 들어있을까?’ 문제집은 폈지만 나는 머릿속에 온통 보따리 생각뿐이었다. ‘할머니가 저렇게 소중히 안고 다니는 것을 보니 분명 귀한 것이 들어 있 을 거야. 그렇다면 돈? 아니야, 짠순이 할머니가 돈을 들고 다니지는 않겠 지. 보석?’ “동이야, 물 좀 다오.” “예, 예.” 물 컵을 들고 들어가자, 할머니는 퍼석퍼석한 피부를 긁적이고 계셨다. “할머니 등 긁어 드릴까?” “응. 그려.” 할머니는 거죽만 남은 등을 내게 내밀었다. “아이구, 시원타. 시원해.” “할머니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뭐예요?” “소중? 글쎄. 어디보자.” 미소를 살짝 보여주시던 할머니는 내 얼굴 가까이 머리를 들이밀더니 말했다. “사람 목숨이지.” ‘목숨? 목숨을 보자기에 넣고 다닐 수는 없고.’ “뭐라고 했냐?” “아, 아니요. 그 다음은?” “에끼. 할미랑 수수께끼 놀이 하자는 거여? 그만 자거라.” 할머니는 보따리를 베개 삼아 누웠다. “할머니 푹신푹신한 베개 있는 데 왜 그걸 베어요. 여기 베개 있어요.” “됐다. 나는 이것이 좋아.” ‘아, 실패다.’ 엄마는 할머니 주위를 맴도는 매미 같았다. “어머니, 우리랑 집 합쳐 살아요. 제가 모실 게요.” “내 집 놔두고 왜 여기서 산다냐!” 할머니는 엄마를 멀뚱멀뚱 바라보더니 방으로 들어가셨다. 엄마의 얼굴은 순간, 벌겋게 달아올랐다. 일요일,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거실을 가득 채우고 아빠는 베란다에서 담배만 피웠다. 그런데, 나는 숙제 할 책을 가지러 할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 입에서 틀니가 튀어나와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틀니가 빠진 할머니 입술은 몹시 쭈글쭈글 했다. 아침에 본 할머니와 전혀 달랐다. ‘으, 냄새.’ 할머니 옷은 노란 오줌으로 젖어 있고 똥냄새도 풍겼다. 얼굴은 하얗게 바래서 오골오골 떨고 있었다. “엄마, 할머니가 좀 이상해!” 엄마와 아빠가 뛰어왔다. “어머니, 왜 이러세요. 정신 좀 차려 보세요.” 할머니는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엄마는 간병을 위해 병원에 남고 아빠는 내일 출근을 위해 돌아왔다. (계속)
  • [유배지 섬을 찾아서] 고려시대 유배지 전남 진도
    해양문학 2020-09-03 15:35:21
    보배 진(珍)자에 섬 도(島). 진도는 그러니까 ‘보배섬’이라는 뜻이다. 과연 보배를 많이 지니고 있는 섬임에 틀림없다. 유명한 진돗개와 진도아리랑, 삼별초, 이순신장군의 명량대첩, 유배문화를 꽃피운 시ㆍ서ㆍ화의 고장, 바다가 갈라지는 모세의 기적. 이렇게 많은 보배들 때문에 진도는 꽤 유명세를 치르고 있으나, 막상 진도에 가보니 아직도 오염이 덜된 섬답게 포장이 안 된 길들이 많고 섬사람들의 인심이나 인정도 순박하기만 하다. 뭍(전남 해남)과 섬을 잇는 진도대교가 있어, 목포에서 배를 타고 울돌목을 건너야 했던 불편함은 덜었었으나, 여전히 진도는 크고 작은 많은 섬들을 거느리며 바다 위에 떠 있다. “ 멀고 아득한 신선이 사는 데와 같은 이 땅은 서울로부터 얼마나 되는고. 하늘이 이 선경으로 하여금 말고 그윽함을 차지하게 하였구나, 고성은 산등성이에 걸치고, 즐비한 집들은 벼랑에 붙어 물결을 베고 있는 것 같다”. 고려 때의 문인 김극기가 진도를 돌아보며 극찬한 글의 한 대목이다. 진도 상조도와 하조도 전경(사진=섬문화연구소DB) 진도는 고려시대부터 유배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최초의 유배객은 고려 인종3년(1125년) 왕의 외조부였던 이자겸의 아들 공의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이곳으로 유배를 왔었다. 다음으로는 고려 의종 24년 무신정변으로 태자가 진도에 유배를 당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더 많은 유배객들이 몰려왔는데, 선조의 두 아들과 상궁 이씨가 이곳에 귀양왔으며, 증종조의 소재 노수신, 고종조의 무정 정만조가 진도 유배로 유명하다. 영조38년(1762년) 진도군수는 장계를 올려 “만약 이대로 두면 장차 도민이나 죄인이 다 같이 굶어 죽어 시체로 산곡을 메울 정도로 참변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일가의 범죄에 관련되어 노복이 된 자나 특별히 유배지를 본군으로 정해 놓고 보낸 자 외에는 모두 타도로 옮겨가 주어야 함께 굶어죽는 것을 면할 수 있겠다”고까지 하였으니, 얼마나 많은 유배자들이 진도로 보내졌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소재 노수신(1515~1590)은 조선조 초기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학자. 29살 때 초시, 회시, 전시에 모두 장원급제하고, 사간원 정언, 이조좌랑을 거치다가 을사사화 때 대윤(대윤)파로 몰려 기나긴 형극생활에 들어간다. 1546년 순천에 유배됐다가 이른바 ‘벽서사건’으로 형이 가중되어 진도로 이배되어 생의 황금기인 30대 40대 19년 동안을 이 섬에서 보내게 된다. 그가 진도에 처음 유배 왔을 때 섬사람들은 혼례라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칼을 빼들고 남의 집 규수를 약탈해다 함께 살곤 했다. 소재는 이 풍습을 고치기 위해 주민들에게 예법을 가르치고 글을 가르쳤다. 훗날 소재의 후손들이 조정의 당파싸움을 피해 이곳으로 왔을 때, 섬사람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도 모두 소재의 가르침에 대한 섬사람들의 보답이었다. 구한말 진도에 유배온 무정 정만조(1859~1932)는 이 섬에서 선비 20여명과 시회(詩會)를 결성, 이 섬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는 작고한 서예가 소전 손재향의 선대와 교분을 갖고, 손씨집 사랑채에 ‘자유당’이라는 서당을 개설, 섬 청년들을 가르쳤다. 이때 무정에게 가르침을 받은 청년 중에는 훗날 우리나라 동양화단의 거목으로 성장한 의재 허백련도 끼어 있다. 매주 토요일 진도읍 무형문화재 야외공연장에서 펼치는 진도토요민속여행 공연(사진=진도군 제공) 진도에 문인화, 동양화의 백리를 내린 최초의 인물은 허소치. 소치는 해남 대흥사에서 초의대사의 지도와 협조로 추사 김정희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어전을 출입하면서 숙종의 은총을 받았었다. 소치의 아들 미산, 미산의 아들 남농 허건은 우리나라 동양화단의 3대에 걸친 화가로도 유명하다. 소치의 방손인 허백련은 소치와 무정의 영향 아래 한국 동양화 6대가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그이 제자로 진도 출신 옥산 김옥진씨가 오늘날 우리나라 산수화의 대가로 평가되고 있다. 이밖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서예가와 동양화가가 이곳에서 배출된 것도 모두 유배문화의 결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 유배객들이 남긴 정신적 유산이 이 고장에 뿌리를 내리고, 그리하여 문화예술의 중흥을 이룩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진도면 성내리 1백 86번지에는 1930년대 이래 40여 년 동안 진도에 유배 온 선비들을 기리는 사당이 있었다. 소재, 무정 등 진도 발전에 공헌한 열두 분의 위패를 모셨던 곳이다. 그러나 1970년대에 각지에 살던 후손들이 사당에 있는 위패를 모셔가는 바람에 사당도 헐리고 말았다. 옛 유배객들이 진도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는 벽파진을 찾아본다. 육지의 끝 옥동포구(해남군)에서 해협을 건너면 바로 벽파나루다. 조그마한 고깃배 두 세척이 나루에 매어있을 뿐, 인적도 드물고 물결도 잔잔하다. 진도대교가 놓여 지기 전에는 진도로 들어오는 모든 배가 이 벽파진에 닿았다고 한다. 목포항을 떠난 배는 물결이 사납기로 유명한 명량해협(울돌목)을 지나 벽파진에 닿거나, 멀리 제주로 가곤했었다. 사람들로 흥청거렸던 그 벽파나루에 지금은 ‘충무공전승비’만 외롭게 서있을 뿐이다. 이성부(시인, 섬문화연구소 상임고문) 이성부 시인(사진=섬문화연구소DB) ※ 이 글은 고 이성부 시인이 생전에 집필한 원고다. 이성부 시인은 1942년 광주에서 출생했다. 고교 때 <전남일보> 신춘문예로 당선됐고 대학생 때 <현대문학> 재등단했고 제대 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했다. <샘이깊은물> 편집주간, <일간스포츠> 문화부장을 지냈으며 섬문화연구소 상임고문을 맡았다. 평소 산을 사랑하며 山시인으로 유명했던 시인은 "섬도 물에 뜬 산"이라면서 남다른 섬사랑을 보였다. 섬문화연구소 답사여행 때 집필한 시인의 육필 원고를 정리해 싣는다.
  • [동화로 읽는 섬이야기] 비응도, 해당화 지다(2편)
    해양문학 2020-09-01 09:57:16
    다음 날에도, 할머니는 품속에 보따리를 안고 거실로 나왔다. 눈을 동그랗게 뜬 엄마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엄마가 몸을 내 앞으로 기울이며 어깨를 으쓱 들었다. 영문을 모를 때 하는 몸짓이다. ‘저 속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엄마를 따라 나도 어깨를 으쓱했다. 궁금했다. 말없이 앉아 있는 할머니를 흘낏 곁눈으로 보았다. “어머니 그렇게 앉아 계시지만 말고 저랑 목욕탕에 갈까요. 네?” 나는 기회는 이때다 싶었다. 보따리를 풀어볼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게 뭐야? 할머니는 그 작은 보따리를 접의자처럼 옆구리에 끼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그렇다면 작전 개시를 시작할 수밖에. 나는 계획에 없는 목욕탕 행을 결심했다. “엄마, 나도 목욕탕 가야겠어. 요즘 몸이 근질거려서…….” 나는 일부러 몸을 긁기 시작했다. “아니, 얘가 아까는 질색을 하더니.” 할머니의 팔짱을 끼고 나는 목욕탕에 도착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할머니 제가 등 밀어 드릴게요.” “그럴래?” 할머니가 내게 등을 내밀었다. 나는 수건으로 할머니의 등을 밀었다. 앙상한 뼈다귀에 수건이 걸려 밀어지지 않았다. “아이구, 시원하네.” “할머니, 궁금한 것이 있는데 보따리 속에 무엇이 들어 있어?” “보따리?” 섬마을 버스(사진=섬문화연구소DB) 할머니는 탈의실 사물함에 두고 온 보따리가 걱정되는지 탕 밖을 자꾸 내다보았다. 마치 보따리를 누가 가져가기라도 할 듯이. 그러다가 누런 이를 내보이시며 씩 웃었다. 나도 따라 어색하게 웃었다. 도통 알 수가 없다. “할머니 그 보따리 한 번만 보여줘!” “안돼! 할머니 보물이여.” “보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게 할머니는 돌아앉았다. 엄마가 그만 하라는 표정으로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목욕이 끝나고도 할머니는 보따리를 먼저 챙겼다. (계속) 박월선(동화작가)
  • [김충호 화백의 화폭의 섬] 우리에게 섬이란 무엇인가
    해양문학 2020-08-10 16:35:02
    김충호 작, '섬' 강진 벌판과 마량 포구가 펼쳐진 강진은 나의 고향이다. 누군들 고향이 그립고 정겹지 않으련만 특히 내 고향 고향의 섬 풍경을 바로고 있노라면, 인간의 원초적인 터전은 섬이고, 섬은 인간의 그리움으로 뿌리 내린 원초적인 고향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아는 오늘도 섬으로 떠난다. 글・그림: 김충호(서양화가. 한국미술협회 강진지부장)
  • [출판 여행] 송종찬 시인 ‘시베리아를 건너는 밤’ 출간
    해양문학 2020-02-13 10:29:06
    존재의 근원적인 감각을 채집하면서 이 세계의 구원과 혁명의 가능성을 묻는 데 각별한 관심을 보여 온 송종찬 시인이 맛깔스러운 문장이 돋보인 산문집을 펴냈다. ‘시베리아를 건너는 밤’이라는 제목으로 삼인 출판사에서 펴낸 이 책은 첫 장부터 흡인력이 대단했다. 프롤로그에서 “안가강 위로 동이 떠오르며 새벽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창문을 여니 자작나무들이 통나무집을 에워싸고 있었다. 안개가 점점 강 끝으로 물러나면서 자작나무의 하얀 종아리가 드러났다. 간밤 자작나무들의 호위를 받으며 잠을 잔 것이다.”(9쪽) 시인이 감각적 기법으로 집필한 탓에 문장 마디마디마다 은유와 운율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읽는 맛이 쏠쏠하다. 시적 묘사와 함축적인 문장을 구사함으로써 여느 산문집보다 색다른 감칠맛이 우러난 게 특징이다. 시인이 구사한 그 문장 숲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누비는 바이칼호수 등 러시아 여행 현지에 있는 것처럼, 동행하고 있는 듯 아름다운 풍광들이 생생한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다는 점에서 평화와 혁명은 비슷하다. 사랑을 모르는 자는 진정한 혁명가가 될 수 없고, 사랑이 없는 혁명은 정의롭지 못하다…1980년대 민주화운동은 특별한 이의 전유물이 아니라 시대의 공유된 코드였다.…입시에 억눌렸던 사랑의 감정이 혁명이라는 단어 앞에서 꽃망울을 터뜨리곤 했다”(24쪽) 시인의 독특한 문장구사가 돋보인 러시아 풍경화들(사진=섬문화연구소) 이 책은 그저 감상에 치우치지만은 않았다. 한 지식인의 언중유골과 솔직담백함 때문에 글쓰기의 진정성까지 담보해냈다. 송 시인은 러시아 혁명가 레닌과 이내사라는 연인을 언급하면서 “두 사람은 사랑을 통해 혁명에 가닿았고, 혁명을 함께하며 사랑의 불씨를 키워 나갔다”고 말했다. 혁명과 사랑을 이렇게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동일성의 원리로 환치할 수 있을까 싶다. 서정적 문장 기교의 파문은 이 책 페이지마다 가득가득 은빛 물살로 출렁였다. 문장의 속살을 따라가는 작은 물결인가 싶으면 강의 이미지로 이어지고 거대한 강인가 싶으면 다시 낙엽이 지고 눈이 내리고 노을이 지면서 영화처럼 암전과 반전을 반복하는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로마와 몽골, 오스만의 지배, 크림전쟁, 제2차 세계대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르기까지 빼앗기고 빼앗기는 역사가 이어졌다. 내륙으로 움푹 들어간 바다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전장이었다.…영국 간호사 나이팅게일이 활약한 곳도 활약한 곳도 머나먼 크림반도였다. 병사의 마지막 죽음을 거두는 손길은 종교적이었다. 죽음 앞에서 아군도 적군도 없었다. 기념탑 주위를 어지럽게 돌고 있는 갈매기 부리에 노을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60쪽) 이 책은 이처럼 시종 서정적 묘사와 역사적 관점으로 다양한 접근법을 시도하면서 시인의 해박한 지식과 정보를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한편으로는 시인의 아들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 등장하는데 아버지의 넓고 깊은 마음을 반추하게 한다. 시인은 런던으로 배낭여행을 떠나는 아들에게 3백 달러를 쥐어주면서 이렇게 독백을 내뱉었다. “나도 아들에게 자유를 주기로 했다. 더 이상 간섭하지 않고 멀리서 지켜보기로 했다. 철부지일 줄 알았는데 3일 동안 여행하면서 아들은 이기적인 나보다 훨씬 인간적인 내면을 갖추고 있었다. 그간 부모에게 대들었던 것은 자유를 달라는 외침이었는지 모른다. 아들과 함께한 사흘 동안 서로의 짐을 들어주고 차를 함께 마시며 우리는 서로의 국경을 넘나들었다”(98~99쪽) 아버지의 마음을 시로도 발표한 바 있는데 ‘마음의 국경’에서 “유로라인 버스를 타고/아들과 처음으로 나선 둘만의 여행길/한방에 둘만 누워 있는 게 서먹서먹하다/한집에 살면서/우리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살았던 것일까//(중략)//자정 넘은 공항 대합실/처음으로 들어본 아들의 심장소리//이제부터 너는 자유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행이 끝나면 결국 몇 장의 장면만 남는다. 가슴 속에 이미지로 자리 잡든, 컴퓨터파일로 남든 한두 장의 스케치로 요약된다. 이미지는 여행 중에 보았던 아름다운 풍광이거나 사람 사는 모습 일 수 있다. 여행을 끝내고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다면 아무 생각 없이 다녔거나 가볼 필요가 없는 곳을 여행했을 가능성이 높다.”(120쪽) 송 시인은 톨스토이 마지막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기술했다. “바랑 하나만을 메고 낡은 기차를 타고 그는 폐렴에 걸려 작은 기차역인 아스타포프역(현재는 톨스토이역)에서 생을 마감했다. 깊은 눈, 휘날리는 수염, 그는 떠났지만 그는 우리 곁에 남았다. 가지고 있는 전 재산과 심지어 문학과 사상까지 버림으로써 불멸이 되었다. 만약 톨스토이가 50대 이전에 누렸던 욕망을 지속했다면 지금처럼 위대한 작가로 남을 수 있었을까.”(143쪽) 그렇게 문학도 인생도 버리고 비움으로써 불멸의 영혼으로 빛난다. 그런 영혼과의 만남을 위해 우리는 오늘도 떠난다. 그래서 여행은 또 하나의 인생이고 그 여정이 나그네 길이다. 송종찬 시인은 고려대에서 러시아문학을, 대학원에서 언론홍보를 전공했다. 1993년 <시문학>에 ‘내가 사랑한 겨울나무’ 외 9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저서로 시집 ‘그리운 막차’, ‘손끝으로 달을 만지다’, ‘첫눈은 혁명처럼’ 등이 있다. 송 시인은 2011년부터 4년여 동안 러시아에 체류하면서 러시아 문화예술의 지극한 세례를 받았다. 러시아 외국문학도서관 부설 루도미노출판사에서 러시아어 시집 ‘시베리아를 건너는 밤(Транссибирские Ночи)’을 출간했고 러시아 루스키 미르재단의 초청작가로 선정됐다. 박상건(시인. 섬문화연구소 소장) 러시아 역사와 문화를 감각적 필치로 묘사한 산문집(사진=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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