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 섬을 찾아서] 고려시대 유배지 전남 진도

사람들로 흥청거리던 벽파나루에 ‘충무공전승비’만 외롭게 서있다.
박상건 기자 2020-09-03 15:35:21

보배 진(珍)자에 섬 도(島). 진도는 그러니까 ‘보배섬’이라는 뜻이다.

과연 보배를 많이 지니고 있는 섬임에 틀림없다. 유명한 진돗개와 진도아리랑, 삼별초, 이순신장군의 명량대첩, 유배문화를 꽃피운 시ㆍ서ㆍ화의 고장, 바다가 갈라지는 모세의 기적. 이렇게 많은 보배들 때문에 진도는 꽤 유명세를 치르고 있으나, 막상 진도에 가보니 아직도 오염이 덜된 섬답게 포장이 안 된 길들이 많고 섬사람들의 인심이나 인정도 순박하기만 하다. 

뭍(전남 해남)과 섬을 잇는 진도대교가 있어, 목포에서 배를 타고 울돌목을 건너야 했던 불편함은 덜었었으나, 여전히 진도는 크고 작은 많은 섬들을 거느리며 바다 위에 떠 있다. “ 멀고 아득한 신선이 사는 데와 같은 이 땅은 서울로부터 얼마나 되는고. 하늘이 이 선경으로 하여금 말고 그윽함을 차지하게 하였구나, 고성은 산등성이에 걸치고, 즐비한 집들은 벼랑에 붙어 물결을 베고 있는 것 같다”. 고려 때의 문인 김극기가 진도를 돌아보며 극찬한 글의 한 대목이다. 

진도 상조도와 하조도 전경(사진=섬문화연구소DB)

진도는 고려시대부터 유배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최초의 유배객은 고려 인종3년(1125년) 왕의 외조부였던 이자겸의 아들 공의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이곳으로 유배를 왔었다. 다음으로는 고려 의종 24년 무신정변으로 태자가 진도에 유배를 당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더 많은 유배객들이 몰려왔는데, 선조의 두 아들과 상궁 이씨가 이곳에 귀양왔으며, 증종조의 소재 노수신, 고종조의 무정 정만조가 진도 유배로 유명하다. 

영조38년(1762년) 진도군수는 장계를 올려 “만약 이대로 두면 장차 도민이나 죄인이 다 같이 굶어 죽어 시체로 산곡을 메울 정도로 참변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일가의 범죄에 관련되어 노복이 된 자나 특별히 유배지를 본군으로 정해 놓고 보낸 자 외에는 모두 타도로 옮겨가 주어야 함께 굶어죽는 것을 면할 수 있겠다”고까지 하였으니, 얼마나 많은 유배자들이 진도로 보내졌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소재 노수신(1515~1590)은 조선조 초기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학자. 29살 때 초시, 회시, 전시에 모두 장원급제하고, 사간원 정언, 이조좌랑을 거치다가 을사사화 때 대윤(대윤)파로 몰려 기나긴 형극생활에 들어간다. 1546년 순천에 유배됐다가 이른바 ‘벽서사건’으로 형이 가중되어 진도로 이배되어 생의 황금기인 30대 40대 19년 동안을 이 섬에서 보내게 된다. 그가 진도에 처음 유배 왔을 때 섬사람들은 혼례라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칼을 빼들고 남의 집 규수를 약탈해다 함께 살곤 했다. 소재는 이 풍습을 고치기 위해 주민들에게 예법을 가르치고 글을 가르쳤다. 훗날 소재의 후손들이 조정의 당파싸움을 피해 이곳으로 왔을 때, 섬사람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도 모두 소재의 가르침에 대한 섬사람들의 보답이었다. 

구한말 진도에 유배온 무정 정만조(1859~1932)는 이 섬에서 선비 20여명과 시회(詩會)를 결성, 이 섬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는 작고한 서예가 소전 손재향의 선대와 교분을 갖고, 손씨집 사랑채에 ‘자유당’이라는 서당을 개설, 섬 청년들을 가르쳤다. 이때 무정에게 가르침을 받은 청년 중에는 훗날 우리나라 동양화단의 거목으로 성장한 의재 허백련도 끼어 있다. 

매주 토요일 진도읍 무형문화재 야외공연장에서 펼치는 진도토요민속여행 공연(사진=진도군 제공)

진도에 문인화, 동양화의 백리를 내린 최초의 인물은 허소치. 소치는 해남 대흥사에서 초의대사의 지도와 협조로 추사 김정희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어전을 출입하면서 숙종의 은총을 받았었다. 소치의 아들 미산, 미산의 아들 남농 허건은 우리나라 동양화단의 3대에 걸친 화가로도 유명하다. 소치의 방손인 허백련은 소치와 무정의 영향 아래 한국 동양화 6대가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그이 제자로 진도 출신 옥산 김옥진씨가 오늘날 우리나라 산수화의 대가로 평가되고 있다. 이밖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서예가와 동양화가가 이곳에서 배출된 것도 모두 유배문화의 결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 유배객들이 남긴 정신적 유산이 이 고장에 뿌리를 내리고, 그리하여 문화예술의 중흥을 이룩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진도면 성내리 1백 86번지에는 1930년대 이래 40여 년 동안 진도에 유배 온 선비들을 기리는 사당이 있었다. 소재, 무정 등 진도 발전에 공헌한 열두 분의 위패를 모셨던 곳이다. 그러나 1970년대에 각지에 살던 후손들이 사당에 있는 위패를 모셔가는 바람에 사당도 헐리고 말았다. 옛 유배객들이 진도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는 벽파진을 찾아본다. 육지의 끝 옥동포구(해남군)에서 해협을 건너면 바로 벽파나루다. 조그마한 고깃배 두 세척이 나루에 매어있을 뿐, 인적도 드물고 물결도 잔잔하다. 진도대교가 놓여 지기 전에는 진도로 들어오는 모든 배가 이 벽파진에 닿았다고 한다. 목포항을 떠난 배는 물결이 사납기로 유명한 명량해협(울돌목)을 지나 벽파진에 닿거나, 멀리 제주로 가곤했었다. 사람들로 흥청거렸던 그 벽파나루에 지금은 ‘충무공전승비’만 외롭게 서있을 뿐이다. 

이성부(시인, 섬문화연구소 상임고문) 

이성부 시인(사진=섬문화연구소DB)



















※ 이 글은 고 이성부 시인이 생전에 집필한 원고다. 이성부 시인은 1942년 광주에서 출생했다. 고교 때 <전남일보> 신춘문예로 당선됐고 대학생 때 <현대문학> 재등단했고 제대 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했다. <샘이깊은물> 편집주간, <일간스포츠> 문화부장을 지냈으며 섬문화연구소 상임고문을 맡았다. 평소 산을 사랑하며 山시인으로 유명했던 시인은 "섬도 물에 뜬 산"이라면서 남다른 섬사랑을 보였다. 섬문화연구소 답사여행 때 집필한 시인의 육필 원고를 정리해 싣는다.  

    박상건(시인. 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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