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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칼럼

[시와 풍경이 있는 삶] 오세영 ‘눈’, 최승호 ‘대설주의보’


세상의 길을 지우기도 하고 닫힌 마음을 열어주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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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을 에는 겨울

추위에 지친 인간은 제각기 자신만의

귀가길을 서두르는데

왜 눈은 하얗게 하얗게 내려야만 하는가

 

하얗게 하얗게 혼신의 힘을 기울여

바닥을 향해 투신하는 눈

눈은 낮은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녹을 줄을 안다

 

- 오세영, ‘눈’ 중에서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 최승호, ‘대설주의보’ 중에서

 

 

한옥마을 설경

2021년 새해 첫 폭설은 대단했다. 그날 저녁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역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렸다. 대설주의보는 24시간 안에 새로 쌓인 눈이 5㎝ 이상일 때 발령된다. 눈은 대기 중의 수증기가 얼어붙어 지상으로 내리는 것을 말한다. 

눈은 세상으로 가는 길을 지우기도 하고, 답답한 사람들에게 마음의 창문을 열어주기도 한다.

눈은 정서와 관점에 따라 기표와 기의가 다르다. 추운 줄도 모르고 눈사람 만들며 깔깔대는 아이들, 폭죽처럼 터지는 눈발 속에서 낭만으로 즐기는 청춘, 막힌 도로에서 애태우는 사람들, 코로나19로 지친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위로가 되는 눈. 

최승호 시인의 ‘대설주의보’는 ‘극도로 막힌 삶의 상황’을 상징한다. 1980년대 얼어붙은 한국사회상을 표현했다. ‘백색의 계엄령’은 군부독재에 의한 억압적 사회현실이다. 

‘대설주의보’의 ‘눈’은 깊은 골짜기를 가득 메워 외딴 산골마을로 가는 길이 끊겼다. 거센 눈보라 속의 ‘굴뚝새’는 단절된 세상을 극복하는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이다. 한편으로는 설경 속 굴뚝새, ‘은하수’처럼 ‘펑펑 쏟아’지는 산촌의 겨울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기도 한다. 

오세영 시인의 ‘눈’은 아래로, 아래로 향하는 눈발이다. 하얀 눈은 ‘순결’의 상징이다. “순한 자만이/자신을 낮출 수 있다”, “인간은 제각기 자신만의/귀가길을 서두르는데”, “바닥을 향해 투신하는/눈은 낮은 곳에 이르러서야/비로소 녹을 줄을 안다”. 

이 시에서 ‘눈’은 동양철학이 바탕이다. 곡선과 배려, 비움과 희생, 낮춤과 겸허다. 이기주의, 경쟁지상주의, 진영논리 등으로 아웅다웅하는 세상에 스스로 낮춰 평안한 길을 가라한다.                  글・사진: 박상건(시인.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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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건
박상건(시인. 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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