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유배지 섬을 찾아서] 최익현, 정약전의 유배지 흑산도
해양문학

[유배지 섬을 찾아서] 최익현, 정약전의 유배지 흑산도


“전하. 소신의 상소가 부당하다면 이 도끼로 저를 죽여주시옵소서”

0

목포항을 떠난 여객선이 다섯시간 남짓 달려와 머무는 곳. 배도 숨이 가빠 헐떡거리고, 배에 탄 사람들도 모두 기진맥진한 모습들이다. 전남 신안군 흑산면 흑산도. 목포에서 100여 킬로미터 쯤 떨어진 서남해의 외딴섬이다. 

지금은 쾌속정으로 두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이지만, 120여 년 전 유배객 면암 최익현(1833 ~ 1906 勉菴 崔益鉉)은 물을 떠난지 꼭 7일만에 이 섬에 당도했다. 돛을 달고, 바람의 힘으로 파도와 싸워가며 이 섬에 닿았을 것이다. 이 섬은 또 200여 년 전 손암 정약전(1758 ~ 1816ㆍ 정약용의 형)이 16년의 유배생활을 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정약전은 이곳에서 우리나라 수산생물을 조사・기록한 ‘자산어보’를 남겼다. 

흑산도 상라봉(사진=섬문화연구소DB)


면암 최익현. 구한말의 유학자이자, 유림을 대표해서 민중을 이끈 항일구국 대열의 거목이다. 그가 어떻게 해서 사람의 발길이 쉽게 닿을 수 없는 이 머나먼 섬 흑산도에 귀양을 오게 됐는가. 

1876년 1월 24일, 최익현은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엎드려 척화의 상소를 올린다.

“전하. 소신의 상소가 부당하다면 이 도끼로 저를 죽여 주시옵소서” 

최익현은 이 무렵 일본의 강박에 못 이겨 한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조약)를 체결하려는 움직임에 분연히 일어나, 죽기를 각오하고 척화(斥和)상소를 올린 것이다. 최익현은 이미 이때 유학자로서의 특성을 강하게 지니면서도 문호개방에 따른 외세의 침입과 일본제국주의의 야욕을 처음으로 통찰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결국 최익현의 상소는 용납되지 않았다. 그는 체포돼 국문을 받았으며, 1월 27일 전라도 나주목 흑산도를 위리안치의 명을 받았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그가 목숨을 걸고 반대하던 저 한일수호조규가 체결되는 날이기도 하다. 그는 2월 9일 유배길에 올라 다경진(多瓊津 ㆍ 지금의 신안군의 한 포구)을 떠난지 7일간의 험난한 항해 끝에 적소인 흑산도 진촌(지금의 흑산도 진리)에 닿았다. 최익현은 이곳에서의 유배생활 4년 만에 방환돼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72세의 노구를 이끌고 분기, 의병을 일으켰다. 

흑산도 예리항(사진=섬문화연구소DB)


그는 각지에서 항전을 계속하다 전북 순창에서 일경에 체포, 일본 땅 대마도로 끌려갔다. 대마도를 가는 길에 양식과 장작, 물을 가지고 갔으며, 이것들이 동이 나자 “내 늙은 몸으로 어이 원수의 밥을 먹고 더 살겠느냐. 너희나 살아 돌아가 나라를 구하라” 고 부하들에게 말한 뒤 식음을 전폐, 운명했다. 그의 나이 73세였다.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난 최익현은 벼슬길에 오른 뒤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사간원정언, 이조정랑, 호조참판 등을 역임했으며, 첫 제주유배에 이어 두 번째로 흑산도 유배를 당했었다. 

옛 면암의 적소였던 진촌마을은 여객선의 닿는 예리항에서 북쪽으로 2킬로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바다와 면한 언덕에 자리잡은 마을, 옹기종기 집들 사이로 백년도 훨씬 더 된 초가집 3채가 나란히 서있다. 흑산면 진리 5백 37번지. 쓰러질 듯한 초가삼간이 곧 면암이 거처했다는 초막이다. 

적소 뒤편에 면암이 이름지었다는 의두석(椅斗石) 바위가 있다. 돌이 편편해 면암이 가끔 올라가 앉거나 누워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는 바위다. 주위에는 소나무와 동백나무가 우거져 있다. 예리항에서 조그마한 통통배를 빌려 타고 우측으로 흑산도 주위를 한 시간쯤 돌아가면 흑산면 천촌리에 닿는다. 면암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고, 비석 뒤 바위에 면암의 육필이 새겨져 있는 곳이다. 흑산도 사람들은 이 마을을 ‘예티미’ 마을이라고 부른다. 

이 유허비는 1958년 흑산면 유지들이 주축이 돼 세웠으며, 비석 뒤 지장암 바위에는 ‘指掌嵒’ 세 글자위에 ‘箕封江山 洪武日月’이라는 여덟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면암이 그의 유배가 풀리던 해인 1878년 제자들을 데리고 이곳에 들렀다가 쓴 것인데, 각자는 제자 박양희(朴良喜)가 한 것이다. ‘기자강산’ 이란 기자가 세운 나라, ‘홍무’란 명나라 태조의 연호이다. 

면암은 흑산도 유배 중 서당을 열어 젊은이들의 교육에 정열을 쏟았다. 아울러 섬 주민들의 인지계발과 폐습타파에도 힘을 기울여, 흑산도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었다. 지금도 이 섬의 노인들은 흑산도가 딴 섬에 비해 미신 폐습 등이 거의 없고, 주민들의 교육열이 유독 높은 것도 모두 면암선생의 영향 때문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이성부 시인(사진=섬문화연구소DB)

 

















※ 이 글은 고 이성부 시인이 생전에 집필한 원고다. 이성부 시인은 1942년 광주에서 출생했다. 고교 때 <전남일보> 신춘문예로 당선됐고 대학생 때 <현대문학> 재등단했고 제대 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했다. <샘이깊은물> 편집주간, <일간스포츠> 문화부장을 지냈으며 섬문화연구소 상임고문을 맡았다. 평소 산을 사랑하며 山시인으로 유명했던 시인은 "섬도 물에 뜬 산"이라면서 남다른 섬사랑을 보였다. 섬문화연구소 답사여행 때 집필한 시인의 육필 원고를 정리해 싣는다.

 

 

 

TAGS
이성부 최익현 정약용 정약전 흑산도 유배
SHARE

박상건
박상건(시인. 섬문화연구소장)

섬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