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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그리운 섬마을 선생님께


이제 제가 교단을 떠날 세월의 파도소리를 맞고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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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지박만한 섬들과 작은 전마선, 그리고 푸른 바다까지도 섬사람들의 억센 사투리만큼이나 낯설던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면 증동리. 그 곳은 이제 제 어린 시절의 사랑과 기쁨, 외로움과 눈물이 머물러 언제부터인가 가슴 저리도록 마음속을 파고드는 영원한 고향이 되어 버렸습니다. 

눈이 시리도록 반짝이는 백사장에서 수평선 너머로 해가 기울 때까지 모래성을 쌓으며 먼 훗날의 삶을 꿈꾸어 보던 곳, 선생님께서는 그 곳에서 탯줄 같은 우리의 배움터를 평생토록 가꾸고 지켜 오셨습니다. 

신안 흑산도 앞 바다(사진=섬문화연구소DB)

선생님, 지금도 저는 아주 가끔씩 염산 마을로 가는 고갯길을 지나 가파른 오솔길을 뛰어가는 꿈을 꾸곤 합니다. 이름도 잊혀진 산봉우리로 오르는 곳에는 선생님께서 매일 새벽마다 기도드리던 터가 있었습니다. 몇 차례인가 선생님을 따라 숨을 헐떡이며 그 새벽 산길을 오르곤 했었는데, 내일 새벽이라도 선생님 손을 붙잡고 그 곳에 다시 오르고 싶습니다. 

그런데, 두터운 코트 깃처럼 언제나 포근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우리를 감싸주시던 선생님을 그동안 한 번 찾아뵙지도 못한 채 그날 선생님의 정년퇴임 소식을 접했습니다. 나의 나태함과 무례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어릴 적 하루해가 짧다하고 들판으로 해변으로 함께 몰려다니던 봉택이, 점수, 여러 친구들과도 안부도 없이 지내온 무심한 저를 또한 나무래 주십시오. 

학교 교정을 빙 둘러 울타리처럼 서 있던 아카시아 나무들도 이제는 하늘을 덮을 듯 무성해졌겠지요. 초여름엔 눈꽃처럼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운동장 이 구석 저 구석에 수북이 쌓이던 그 하얀 꽃송이들 .선생님 몰래 슬금슬금 몇 송이를 따서 한 입 가득 머금으면 솜사탕처럼 달콤한 맛이 입속에 퍼지던 요술 꽃송이들 .그 정결하고 탐스런 꽃들이 중년이 되어버린 제 눈 속에 어느 날 갑자기 들어 올 때면 그 향기에 파묻혀 펑펑 울고 싶어진답니다. 

그 시절 도회지에 계셨던 제 어머님께서는 한 달에 한 두 번씩 그 곳에 오셨지요. 어머님이 오신다는 그 날은 아침부터 선생님의 말씀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겨울바람이 차가운 날에도 학교가 끝나기가 무섭게 큰 염전 너머 십리길 넘는 먼 선착장으로 달려 나가 뱃고동 길게 울리는 천신호가 선착장에 도착할 때까지 밀려드는 파도 위로 수없이 돌팔매질을 하곤 했지요. 

그러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혼자 돌아오던 날, 어스름 녘에 퇴근길을 나서시던 선생님을 뵈었지요. “오늘은 어머님께서 못 오시나 보구나. 사내 녀석이 힘내야지.” 하시며 다정한 목소리로 저의 처진 어깨를 다독거려 주시던 일, 그런 아름다운 순간들이 숱한 세월이 지난 이 시간까지도 은빛모래 알처럼 기억 속에서 반짝거리고 있어 저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합니다.

운동장까지 적실 듯 밀려들던 바닷물이 어느 덧 빠져 나가고 끝없이 펼쳐진 모래 평원에서 선생님을 따라 대합을 캐던 날은 우리들이 갑자기 큰 부자가 된 듯 가슴이 부풀곤 했었지요. 밤마다 물소리가 긴 띠를 펼치고 밀려오던 유난히도 달빛이 영롱하던 어느 여름밤, 오랜만에 오신 어머니 곁에 누워서 저의 소망을 말씀드렸답니다. “어머니, 저도 크면 훌륭한 선생님이 되어 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가르치는 일에 대한 깊은 정열과 무거운 사명감이 무엇인지 알 턱이 없는 어린 마음은 그저 존경하는 선생님의 다정하신 모습만을 본받고 싶었던 것이지요. 한평생을 일관하시어 한 길을 걸으시고 이제 그 정상에서 긴 삶의 여정을 돌아보시는 선생님, 그 긴 세월의 모습은 돌에 아름답게 새겨진 당신의 이름보다도 더욱 또렷하게 당신의 당당하신 모습으로 수많은 제자들의 가슴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답니다. 

존경하는 선생님, 이제 제가 교단을 떠나갈 세월의 파도소리를 맞고 서 있습니다. 아무쪼록 늘 푸른 백사장의 소나무처럼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십시오. 그리운 선생님.

 

파도에 밀려 떠 내려 가다가

땅 끝에 걸려 선 작은 섬

 

꿈결에나 들려질까

아스라한 기억의 한 귀퉁이에서

가을날의 산모퉁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곳

 

칠흑 같은 여름밤

관사의 양철지붕을 때리는 무더운 빗줄기로

작은 우리 집은 외딴 섬이 되고

해진 동화책을 붙잡고 잠들던 시절

 

아카시아 꽃처럼 수많은 기억의 편린 속에

또렷이 떠오르는 분

빛바랜 갈색 골덴 양복 속에

항상 사랑스런 미소로

외로움 속의 어린 시절 꿈을 심어 주셨던

바다처럼 넓으신 선생님

 

세월이 겹쳐, 겹쳐 흘러 지나고

천리 밖에서 처음 듣는 음성이지만

난 금방 알 수 있었네

 

마음은 어느 새 푸른 서해 바다를 섬광처럼 지나

그 시절의 따스한 손길을 느끼네

그 따스한 넓은 가슴에 안기네

오진곤(서울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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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섬마을 선생님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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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건
박상건(시인. 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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